1971년도에 발행한〈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이 있다. 여기 편저자(編著者)는최덕교(崔德敎) 사장이다.그는 창조사(創造社) 라는 출판사를 갖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한국의 성씨관계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갖고 있었으며 또한 성씨의 문중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 저서의 참고문헌(參考文獻)을 보면 대단한 자료를확보하 고 책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여느 성씨관계의 책보 다 방대하고 신뢰가 가는 것을느낀다.
참고로 삼았다는 문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賞錄),동국여지승람(東國興地勝覽),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 群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고려명신록(高麗名臣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여말명현록(麗末名賢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전고대방(典故大方), 조선민족통보(朝鮮民族統譜), 한국인명사전(韓國人名 辭典),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등 무려 40여개의 문헌을 참고 자료로 본 것이다. 「한국성씨대관」저술에 참여한 석학(領學)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내용을 감수(監修)하였다. 여기에 신석호(申奭鎬)박사도 참여한 것이다. 이상옥(李相玉) 문학박사,강주진(姜周鎭) 법학박사,최상수(崔常壽) 민속학회 회장이 감수에 참여한 것이다.
이 저서에 아주신씨(鵝洲申氏)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이다.
「아주신씨(鵝洲申氏)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신영미(申英美)이다. 아주신씨(鵝洲申氏) 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고려말기(高麗末期)에 효자(孝子) 신우(호퇴재)(申祐(號退齋))가 나타난 이후의 일이다. 신우(申祐)는 충혜왕때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를 지내고 그의 부판도판서 신윤유(父版圖判書 申允儒)가 죽자 3년간 여막(慮幕)에서 지냈는데 무덤앞에 쌍죽(雙竹)이나므로 그의 효(孝)를 기리어 정려가 세워졌다. 그 유허(遺墟)인 경북의성(慶北 義城)에는 지금도 효자비(孝子碑)가 남아 있고 후손(後孫)이 이 지방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이조시대(李朝時代)에 크게 벼슬한 이는 없으나 학자(學者)와 청직(淸直)• 효행(孝行)으로 이름을나타낸 사람이 많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신원록(申元綠)과 그의 손자 신적도 • 신달도 •신열도 (申適道 • 申達道 • 申悅;道) 3형제 그리고신지제 • 신홍망 부자(申之悌 • 申弘望 父子)를 꼽을 수 있다.회당 신원록(晦堂 申元綠)은 申祐의 6대손으로 일찍이 남명 조식(南溟 曺植)에게 학문(學問)을 배우고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硏究)한 명종(明宗) – 선조대(宣祖代)의 학자 (學者)로서 장천서원(長川書院)을 세워 모재 김안국(慕齋金安國)을 향사(享祀)했으며효행(孝行)이 뛰어나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회당(晦堂)의 손자(孫子)인 호계 신적도(虎溪 申適道)도또한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이 뛰어나고 정묘호란(丁卯胡亂)때의병(義兵)을 일으켰으며 찰방(察訪)을 지냈다. 그 아우신달도(호만오)申達道(號晩悟)는 월천조목(月川趙目)과 여헌 장현광(旅軒張顯光)의 문인(門人)으로인조원년 정시문과(仁祖元年 庭試文科)에 급제하여 三司를 역임하고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江都(江都)에 호종척화(扈從斥和)를주장했다. 신열도(호 난재)(申悅道(號 欄齋))는 만오(晩悟)의동생으로 또한 仁祖2년(162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를 강도(江都)로호종했고 서장관(書狀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울진현감(蔚珍懸監)이되고 1648년 掌令을 거쳐 稜州牧使를 지냈다.」
※ 주(註) : 강도(江都)는 몽고침입 당시 고려가 강화도로 옮겼는 데서 표기한 임시수도의 명칭.
● 한국사대사전(韓國史大事典)
1988년 9월 개정증보판이 간행되었다. 이사전은 '고등학교·대학교 학생의 학습보조와 일반인의 교양을위하여 엮은 한국사 백과사전'으로서, '국사의 대중화' 그리고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에주안점을 두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사 중심의 정치·경제·문화·사회·예술·인물·지명·왕조·서적·민속·고고·설화는 물론, 한국사와 관련있는 중국의 역대왕조, 일본, 몽고, 거란, 여진 등의 관련사항들을 광범위하게 수록했다.
인물은 작고한 사람에 국한하고, 설화및 중요 고전의 등장인물까지 수록했으며, 한국 역사와 관계깊은 외국인도 선정하여 수록했다.
최신의시사사항은 가급적 피했으나 중요한 것은 정리했다. 지명은 〈삼국사기〉에서 〈동국여지승람〉까지 각 지리지에나타나는 고지명은 물론 한국사 전지역을 대상으로 했고, 그 서술은 역사적인 연혁의 정리에 중점을 두었다. 사전의 끝부분에는 국사와 세계사연표를 수록했다.
사학자(史學者) 유홍열박사(柳洪烈博士)가 감수(監修)한 교육출판공사(敎育出版公社) 발행의 한국사대사전(韓國史大辭典)이 있다.
여기에주요성씨의 시조일람표가 있는데 신씨(申氏)편에는 평산(平山),고령(高靈),이천(利川),은풍(殷豊),천안(天安),아주(鵝洲),신천(信川),영해(學海),곡성(谷城),조종(朝宗),삭녕 (湖掌),창주(昌州),12곳의본관표기를 하였다. 그리고 각 시조 의 이름도 표기해 놓았다. 아주는 권지호장(權知戶長)의영미(英 美)가 시조라고 표기하였고 은풍만이시조가 본래 평산인(平山人)이라 표기하였다. 平山人이란 말은 평산신씨란 뜻이다.
● 한국인의족보(韓國人의族譜)
도서출판 일신각(日新閣)에서 펴낸 방대한 내용의〈韓國人의 族譜〉가 있다. 편찬을 한 측은〈한국인의족보편찬위원회〉였다. 1977년도에 발행된 것인데 이 책의 내용에서 아주신씨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을하여 놓았다.
<始祀및 本貫의 由來>
시조 영미(始祖英美)는 고려말엽(년대미상)(高麗末葉(年代未詳)) 거제군 (巨濟郡) 소속(巨濟郡) 아주현(鵝洲縣)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이 되 었으므로 그 후손(後孫)들이 아주(鵝洲)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아주신씨(鵝洲申氏) 의 각 가정에 가지고 있는 옛날 가첩(家牒)은 물론 영조 (英祖)때에 편찬한 문헌비고(文獻備考)와그 밖의 문헌(文獻)에도 신영미(申英美) 가 아주신씨(鵝洲申氏)의 시조(始祖)로 명기(明記)되어 있으나 근세(近世)에 와서 신영미(申英美) 위에가공적 (申英美) 인물(人物)인 신익휴(申益休)를 첨가(申益休)하여 평산신씨 (平山申氏)의 시조 장절공 신숭겸(始祖 壯節公 申崇謙)과 관계를 붙여 신숭겸(申崇謙)을시조(始祖),신익휴 (申益休)를 중시조(中始祖)로 한족보 (族譜)가 나타났다.그러나 이것은 1817년(純祖17)에 공주(公州) 사람김노정(金魯定)이 위조(僞造)한 〈만성보 萬姓譜〉에 의한 것으로 당시 김노정(金魯定)을 방문(訪問) 조사 (調査)한 도와 신정주(陶窩申鼎周) 의 〈서호기행(西湖紀 行)〉에 의하여 그 그릇됨이 명백히 밝혀졌다. 따라서 숭겸(崇謙)을 시조(始祖)로 하고 익휴(益休)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그 계대(系代)를 살피는 것은 큰 잘못 이라하겠다.